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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생각정리

한국회화의 두 거장, 이중섭과 박수근.

by newsboy koala 201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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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눈, 한국회화에 눈뜨다.

 

  자화상, 하면 기껏해야 렘브란트와 고흐 정도밖에 떠올릴 수 없는 사람. 그들의 작품을 보고, 음, 참 많이 그렸군, 정도의 감상밖에 말하지 못하는 인간. 그게 바로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실 도입부에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된 일련의 「자화상」들을 보고 느낀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물체(사람)은 여러 대응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영환님의 「자화상」은 그 구성면에서 기존의 작품과 차이가 있었다. 1점 투시도법으로 표현된 황량한 길 위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파스텔처럼 부드럽고 뿌옇게 표현하여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작품이 합판에 유채로 그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작가의 외모보다는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려는 의도인 듯하였다. 뿌옇게 처리한 것은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심연(深淵)이 가로 놓여 있음을 표현하려는 것 같았다.

 

  하인두님의 「자화상」은 얼굴을 파묻고 쪼그려 앉아있는 모습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조가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었다. 작품 속에 표현된 인물의 자세나 전반적인 색채가 어두운 것에서 음울함이 느껴졌다.

 

  김 을님의 「나」는 합판에 동판을 붙이고 유채를 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자화상은 붓으로만 그린다는 선입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부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적 심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동판의 차갑고 날카로움에서 능히 인물의 심리상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재료 역시 표현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되었다.

 

  차대혁님의 「자화상」은 처음엔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인 줄로 착각했었다. 작품 속 인물의 얼굴에 붙은 파리 묘사가 너무도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서 얼굴 윤곽을 회색 톤으로 희미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와 대비되게 파리는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하인두님의 작품과 달리 음울한 주제가 훨씬 와 닿았다.

 

  자화상 섹션 마지막에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들어진 앤디 워홀의 「자화상」도 전시되고 있었다. 상반기에 열렸던 앤디 워홀 작품전시회에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었는데 무척 반가웠다. 그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상업적 마인드와 표현기법에 있어서의 천재적 발상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공허함이 묻어났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한 기존 이미지 반복과정에서 모델의 일그러짐.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미국적 가치. 모두가 그가 의도한 바였겠지만, 그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왠지 씁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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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화의 두 거장, 이중섭과 박수근

 

  전시회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감상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 전시회 감상은 작품에 대해서 하나 하나 생각하고 해석하고 추론하는 탐험이기 때문이다. 넓은 갤러리를 거닐면서 점점 지쳐갈 때쯤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건 이중섭님의 「투계」. 신기루가 아닌가, 하고 두 눈을 비벼댔다. 힘 있는 직선과 단순화를 통해 역동적으로 표현된 닭들의 모습이 이중섭님의 작ㄷ품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작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김용주님의 「투계」가, 오른쪽에는 「부부」가 걸려 있어 비교하면서 가상하기에 적합했다.

 

 

이중섭 「부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용주님의 「투계」는 이중섭님의 작품보다는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졌다. 눈동자를 강조하여 투계의 독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었다. 특히, 목주위의 깃털을 위로 향하게ㅐ 묘사한 것은 투계 특유의 상징을 잘 묘사하면서 강인함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바탕은 푸른색과 황토빛으로 처리되어 붉은 닭의 모습과 함께 삼원색의 배열을 보여주어,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중섭님의 「부부」는 선 표현에서 이중섭님의 「투계」와 같은 작풍(作風)을 보여주었지만 구도와 색채 면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강조하고 있었다. 「투계」와 달리 배경을, 저녁노을이 비친 바다처럼, 가로선으로 연분홍과 짙은 파란색을 번갈아 표현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새가 부리를 맞댄 모습에서는 부부를 연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투계」와 무척 다른 분위기 때문에 전체적 구도에서 우리네 문관복(文官服)의 흉장(胸章)과 유사한 구도를 보이고 있고, 두 마리의 새가 위 아래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조화'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불현듯 오래전에 읽었던 김춘수님의 詩 <내가 만난 이중섭>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이윽고 다시 작품을 바라보니 부리를 맞대지 못해서 눈을 부릅뜬 새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바다 건너의 아내를 만나지 못해 늘 수심에 차있던 작가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인생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감상이 크게 바뀔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릴 종이가 없어 담배 껍질인 은지(銀紙)에 그렸다는 이중섭님의 「물고기와 아이들」은 작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였다. 말로만 전해 듣던 유명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이중섭님의 작품들 옆으로는 박수근님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바수근님의 「노상」은 우둘투둘한 화폭의 질감으로 벽화를 보는 듯한 특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하얀 한복과 노상의 모습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질박한 풍경 묘사가 우리의 조선백자를 보는 듯한 담백한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거장이군, 하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박수근님의 「할아버지와 손자」는 쭈그려 앉은 할아버지와 그 품안에 안겨서 앉아있는 손자의 모습이 크고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었다. 배경의 일하는 아낙들의 자세 묘사나 주된 인물을 크게 표현하는 방법에서 흡사 무용총을 보는 듯한 구도와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화백의 성정(性情)만큼 구수하고 순박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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