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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생각정리

영화와 도서로 보는 서양의 역사(4)

by newsboy koala 2015.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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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言

Ⅱ. 미국인의 일본인 인식방법

   (1) 영화 「도라도라도라」와 영화 「진주만」비교

   (2) 영화 「도라」와 다큐 「진주만의 신화」비교

   (3) 영화 「진주만」과 「신화」비교

   (4) 종래의 사무라이에 대한 인식의 허구성

   (5) 소결(小結)

 Ⅲ. 미국인의 전쟁관

   (1) 영화「도라 와 영화「진주만」비교

       - 카우보이의 필요성 제기와 탄생

   (2) 영화 「도라 와 다큐멘터리「신화」비교

       - 해군중심주의에서 공군중심주의로

   (3) 영화「진주만」과 다큐「신화」와 도서 「국화와칼」

       비교

 Ⅳ. 국제경찰개념과 진주만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1) 하와이 서편을 향한 카우보이의 열망 - 제2의

    서부개척

    (2) 미국헌법과 국제법적 측면에서 본

         조미수호통상조약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3) 헤이그 평화회의 - 국제경찰개념의 실현

    (4)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제경찰개념과 천안함 사건과

         Sea of Japan 논란

 Ⅴ. 논의의 확장 ; 영화 속 현대판 카우보이

 Ⅵ. 結語

 Ⅶ. 참고문헌 및 영상

 

 

 

 

. 미국인의 일본인 인식방법

  (4) 종래의 사무라이에 대한 인식의 허구성

   종래의 사무라이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란 무언인가」라는 짧은 단행본이다. 이 책의 내용을 하나 하나 근거를 들어 비판하기는 지면상 어렵기 때문에 몇 가지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은 사무라이에 관한 기록의 출처를 세세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 결과 니토베가 원하지 않는 사실(예컨대 명예를 빙자해 살상을 자행했던 사실)은 떠도는 풍문으로 치부되지만, 그가 원하는 사실(예컨대 공격이 실패한 불명예스러운 상황에서 할복자살하는 것)은 확고한 역사적 사실로서 묘사하고 있었다. 특히 공격이 실패한 경우 할복자살하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지키지 못한 예가 있다.¹  게다가 「무사도란 무엇인가」에 인용된 주(註)는 대부분 서양의 서적을 비유적으로 차용한 것이었다. 「무사도란 무엇인가 」는 역사적 고증이 부족한 전략적 홍보서에 불과했지만, 미국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미국인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는 직ㆍ간접적 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전쟁 중의 일본인'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었다.

 

  군함이나 대포는 바로 불멸의 일본 정신에 대한 외면적 표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무라이의 칼이 마치 용기의 상징이었듯이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미국이 계속해서 물량(物量)의 증대에 전력을 기울인 것 같이, 일본은 비물질적 수단을 이용하는 데에 시종일관했다. (중략) 그들(일본) 말에 의하면, 정신은 전부이며 영구불멸한 것이다. (중략) 그들(일본)의 군대용 문답서는 "그들(미국)의 수효에는 훈련으로 맞서며, 강철에는 육탄(肉彈)으로 대항한다."는 표어를 사용했다. 이 표어는 이번 전쟁을 위해 특별히 지어낸 거싱 아니고 전통적인 것이다. 그들(일본)의 군인 수첩은 큰 활자로 인쇄된 '必讀 必勝'이라는 문구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소형비행기로 아군 군함속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조종사들은 물질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교훈이 되었다.²

 

 -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국화와 칼」 27면 참조 -

 

 

 

밑줄부분이 잘못된 인식임은 영화「도라」에 등장했던 쿠로시마 카메토(간디)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다.³ 육탄(肉彈) 공격의 개념은 1943년 4월에 야마모토 사령관이 피격되자(해군 갑사건) 쿠로시마가 분노하여, 인간을 무기로 한다는 특공이란 수단을 최초로 정립하면서 비로소 등장한 개념이다. 게다가 쿠로시마는 종전후 다른 군인들처럼 본토결전을 주장했으나, 전후(戰後) 전쟁범죄에도 관련되지 않았고 자결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종래의 사무라이에 대한 인식이 허상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더구나 「국화와 칼」을 저술한 루스 베네딕트는 단 한 번도 일본에 간 적이 없었다는 점도 저서의 신뢰성에 의심이 가게 한다. 루스는 「국화와 칼」을 저술하기 위해 미국 내 많은 일본 이민자들을 인터뷰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 내 일본인에 대한 수용소정책(Interment of Japanese)⁴에 따른 일본이민자들의 감정을 고려할 때, 인터뷰 내용이 다소 과장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註)

 

 1. 오와다 데쓰오 지음, 이언숙 옮김, 「도쿠가와 3대」53면 참조 1572년(겐키 3년)에 미타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간신히 도망쳤다고 한다.

 2. 밑줄은 루스가 아닌 필자가 첨가했다.

 3. 福川秀樹 編著,  日本海軍将官辞典(ISBN:482950272X) - 자료가 국내에 없어 웹(WEB)에 있는 번역문을 참조했습니다. 도위창 번역. [http://blog.naver.com/mirejet/110095428071] - 최종방문일 2010년 12월 1일

 4. Carnes, Carraty, (2008) The American Nations p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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