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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생각정리/뉴스보이 코알라 소설

영화와 도서로 보는 서양의 역사(9)

by sunbykoala 201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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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言

Ⅱ. 미국인의 일본인 인식방법

   (1) 영화 「도라도라도라」와 영화 「진주만」비교

   (2) 영화 「도라」와 다큐 「진주만의 신화」비교

   (3) 영화 「진주만」과 「신화」비교

   (4) 종래의 사무라이에 대한 인식의 허구성

   (5) 소결(小結)

 Ⅲ. 미국인의 전쟁관

   (1) 영화「도라 와 영화「진주만」비교

       - 카우보이의 필요성 제기와 탄생

   (2) 영화 「도라 와 다큐멘터리「신화」비교

       - 해군중심주의에서 공군중심주의로

   (3) 영화「진주만」과 다큐「신화」와 도서 「국화와칼」

       비교

 Ⅳ. 국제경찰개념과 진주만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1) 하와이 서편을 향한 카우보이의 열망 - 제2의

    서부개척

    (2) 미국헌법과 국제법적 측면에서 본

         조미수호통상조약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3) 헤이그 평화회의 - 국제경찰개념의 실현

    (4)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제경찰개념과 천안함 사건과

         Sea of Japan 논란

 Ⅴ. 논의의 확장 ; 영화 속 현대판 카우보이

 Ⅵ. 結語

 Ⅶ. 참고문헌 및 영상


 



Ⅳ. 국제경찰개념과 진주만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3) 헤이그 평화회의 - 국제경찰개념의 실현¹

   국제경찰개념의 기원은 1823년 먼로독트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한 국가가 미국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유럽 열강에 의한 중남미의 영토할양이나 체제이식을 금지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미국의 이러한 안보 독트린은 19세기 말까지 커다란 도전을 받지 않았다. 대서양과 나폴레옹 전쟁 후 구축된 비엔나체제(1815)가 그것의 유지를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체제를 통해 세력균혀을 이룬 유럽이 저마다 내부발전에 치중함으로써,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로 팽창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미국은 약한 국가가 자국의 안전을 해칠수 있다는 논리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부활시키는 한편, 양대양 건너 해외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중남미 대륙에서 발생한 제1차(1895~1896) 및 제2차 베네수엘라 위기(1902)와 태평양 건너에서 발발한 청일전쟁(1894~1895) 및 러일전쟁(1904~1905)이 그 계기로 작용했다. 두 차례의 베네수엘라 위기는 먼로독트린이 시험무대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제1차 위기에서 영국은 베네수엘라에게 국경양보를, 제2차 위기에서 독일은 차관회수를 빌미로 군함을 파견하여 사실상 베네수엘라에게 영토할양을 각각 요구했던 것이다. 이 위기는 태평양 방면에서도 일어났는데, 한국이 바로 그 당사자였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청일 및 러일전쟁이 미국의 '군사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진앙지로 작용한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 논리였다. 첫째, 한반도 해역에서 전함이라는 신형 무기가 선보였다. 황해에서의 청일해전을 보면서 미국은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고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고 평가했는데, 러일해전을 목격한 후 미국 해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필리핀에서 하와이로 옮기기로 결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필리핀에 건설할 경우 방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으로 하여금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게서 칼을 빼앗지 못하므로 국제법이라는 새로운 올가미를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삼국간섭(1895) 후 한반도 수역에는 전세계 열강의 해군기지가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은 교주만을, 영국은 위해위를, 러시아는 여순을 각각 새로운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셋째, 한반도 해역에 배치된 열강의 해군은 중국과 스페인 해양제국을 해체할 수 있는 교두보로 작용할 수 있었다. 넷째, 한반도는 새로운 세력균형의 진앙지로 작용하고 있었다. 전함의 등장은 기존의 세력균형을 지구적 차원의 세력균형으로 확장케 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은 제1차 영일동맹(1902)을 결과했고, 그것은 러불동맹과의 대결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또한 이 전쟁은 러불동맹과 삼국동맹진영과의 일시적 제휴, 즉 대륙동맹 탄생의 가능성을 드러낸 바 있으며, 독일과 영국의 제휴 또한 실체화 일보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영일동맹으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러일동맹이 다시 시도될 가능성도 있었다. 다섯째, 그리하여 한반도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이유로 미국은 국제경찰제도를 구상하게 되는데, 당시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첫번째 장애는 유럽의 군사동맹을 근간으로 하는 세력균형체제였다. 다른 하나는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수단으로 채택한 중재재판제도 때문이었다. 이 제도는 악용될 소지가 있었다. 재판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재판의 결과를 강행할 수단 또한 결여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럽의 군사동맹은 유럽식 국제경찰제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은 세력균형체제를 전쟁체제로서, 먼로독트린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미국식 세력균형과 미국식 중재제도를 내세웠다. 유럽식 세력균형 및 중재제도에 정의의 개념을 주입함으로써, 미국식 평화안의 특징인 국제경찰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이 국제경찰은 상위 기구인 세계법정과 세계헌법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 평화 연맹(League of Peace)을 상정한 개념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당장은 문명국 간에 중재조약망만 구축하고, 후진국(약한 국가)과 문명국 간의 중재조약은 유보하고, 대신 약소국들을 관리할 수 있는 국제경찰제도를 만든다.'라는 입장을 가지고 임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중남미 국가 전부를 헤이그로 데려가면서도 한국은 제외시키도록 러시아에 종용한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먼저 중남미의 경우 드라고 독트린을 헤이그 중재재판소의 규약으로 채택시킬 경우, 유럽열강이 중남미에 제공한 채무 회수에 착수할 때, 중재재판단의 일원인 미국이 개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드라고 독트린은 아르헨티나의 드라고 외상이 제2차 베네수엘라 위기 후에 발동한 중남미판 먼로독트린을 말한다. 그것은 '채권국은 채무국에 부채회수의 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제외되었는가? 그 이유는 문명국 간의 동맹망이 구축되어있는 상황에서 문명국과 약한 국가 간의 중재조약은 유럽열강의 세력 균형망을 약한 국가들로 확대하는 결과, 즉 세력균형의 지구화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한 국가인 한국이 기존의 동맹망에 포섭될 경우, 전쟁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게 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비록 한국이 헤이그에 초청받지는 못했지만, 초청받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한국이 미국식 패러다임의 신세계 질서에 이미 포섭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 보여준 미국의 평화구상의 기본원리가 현재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4)항에서 논하도록 한다.


 



 

 주(註)

1.최정수,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와 미국의 '세계평화전략'을 참조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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